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나치 독일/인물 (문단 편집) === 학살자 === * '''[[쿠르트 달루게]]''' '''[[슈츠슈타펠|SS]][[상급대장]] 및 [[질서경찰]] [[총수]]''', 리디체 학살의 책임자 * '''[[고틀로프 베르거]]''' [[오스카 디를레방어]]의 '''유일한''' 친구. SS본부에 근무하였으며 최종 계급은 SS대장. 12. SS-Panzer-Division Hitlerjugend와 각종 외국인 SS사단의 입영 계획을 입안했다. * [[아르투어 플렙스]] <프린츠 오이겐>의 초대 사단장 * '''[[아우구스트 폰 마이츠너]]''' * '''[[카를 헤르만 프랑크]]''' * [[우도 폰 보이르슈]] * [[야코프 슈폴렌베르크]] * [[https://thinktankboy.files.wordpress.com/2013/12/wrauff.jpg|발터 라우프(Walther Rauff)]] (1906년 6월 19일 - 1984년 5월 14일) [[홀로코스트]] 초창기 배기가스로 유대인들을 학살한 S트럭의 개발자. 종전 후 [[칠레]]로 달아났다. * [[빌헬름 레디스]](Wilhelm Rediess) (1900년 10월 10일 - 1945년 5월 8일)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후 프로이센에서 [[홀로코스트]] 집행에 관여하여 동프로이센의 유대인을 강제 수용소로 보내는데 관여했고 1,558명의 정신병 진단을 받은 유대인을 가스로 70일에 걸쳐서 살해했다. 이후 노르웨이의 친위대 및 경찰 고급지도자로 임명된 레디스는 독일의 패전까지 자리를 유지했는데, 또한 금발벽안이 많았던 북구인종의 노르웨이인과 독일인의 '''결혼이라고 쓰고 [[강간]]이라고 읽는''' 이른바 [[레벤스보른]]을 권장하여 8천명의 아이들을 태어나게 하기도 했다. 1945년 5월 8일에 레디스는 노르웨이에서 자살했다. 그의 시체는 노르웨이 점령판무관이던 요제프 테어보덴에 의해 벙커로 옮겨졌고, 이후 테어보덴도 스스로 폭탄을 터뜨려 자살했다. * [[아르투어 네베]] (Arthur Nebe) 독일 경찰이었으며 경찰 조직이 친위대에 완전통합된 후에는 [[슈츠슈타펠]] 중장이 되었다. [[아인자츠그루펜]]B부대의 책임자로서 [[바르바로사 작전]]당시 학살에 일조하였다. 혹자들은 Krippo(범죄 경찰)이 친위대에 흡수되는 것을 끝까지 반대했다는 것과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에 가담한 것때문에 네베를 저항자로 보고 있으나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그가 프로이센 경찰때부터 반유대주의에 앞장섰다는 것을 찾아내었다. 현재 대다수의 평가는 자신이 일하던 경찰조직이 갑툭튀한 친위대에 넘어가는 걸 싫어했기 때문에 [[하인리히 힘러]]의 제거를 위해 암살작전에 가담했다고 한다. * '''[[아몬 괴트]] (Amon Leopold Göth)''' (1908년 11월 12일 - 1946년 9월 13일) [[http://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3/33/Amon_goeth_1946.jpg|다른 사진]]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에서 인쇄업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나치에 매력을 느껴서 1930년에 오스트리아 나치당에 입당 후 친위대에도 입대해 친위대 이등병이 되었다. 그러나 당시의 오스트리아 나치당은 오스트리아 정부에 의해 비합법정당으로 지정되었기 때문에 오스트리아 SS부대는 지하테러조직이나 다를 바 없었고, 결국 괴트도 오스트리아 경찰로부터 폭탄테러 용의자로 수배되어 독일의 뮌헨으로 달아나려 했지만 여의치 않았다고 한다. 열성적인 나치당원으로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한 괴트는 모범적인 친위대원으로 평가받았고 1937년엔 친위대 상사로 승진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후 1940년 3월에 폴란드로 파견되어 동유럽과 러시아에 체류 중인 독일인의 보호와 데려오는 작업에 참가한 괴트는 1941년 7월에는 친위대 소위로 승진했고 1942년 8월부터는 루블린 지구의 경찰 지도자 사무소로 이동하여 각 지구의 게토 해체작업에 종사했다. 이 공적으로 괴트는 1943년 2월에 크라쿠프 근교의 강제노동수용소의 소장으로 임명되었다. 친위대 소위급으로는 이례적인 소장취임으로 1943년 5월에 크라쿠프의 게토를 해체한 괴트는 많은 유대인들을 학살하고 일할 수 있는 자는 강제 수용소로 보냈다. 1943년 7월에 SS의 소장들로부터 추천을 받아 2계급을 특진하여 친위대 대위로 승진했다. 키가 192cm에다가 120kg의 거인이었던 괴트는 변태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어서 '''재미로 사람을 총으로 쏴죽이는 인간 도살자였다.''' 매일 아침 저격용 소총으로 수용인을 사살한 후 그 시체를 롤프와 랄프라는 그가 사육하는 개 두 마리에게 던져주는 것이 일과였다. 괴트에게 직접 총으로 살해당한 수용인만 해도 500명 이상이어서 '''프와쉬프의 도살자'''라는 별명을 얻었다. 괴트는 부하들에게도 냉혹하여 조그마한 실수도 용납하지 않고 친위대의 규율위원회 및 경찰에 인도했다. 웃긴 것은 자신은 사리사욕을 채워 국고에 귀속될 몰수한 유대인들의 재산을 횡령한 것이다. 유대인으로서 예외적으로 괴트의 기사로 일했던 수용인 미테크 펜퍼는 '''독일군이 동부전선에서 죽고 있을 동안에 괴트는 수용소에서 술탄처럼 군림했다.''' 라고 증언했다. 그러다가 횡령 혐의가 드러나 1944년 9월 13일, 횡령혐의로 빈에서 친위대에 체포된 괴트는 심리를 받던 도중에 종전을 맞이했다. 다하우 강제 수용소의 흔적지에 세워진 포로 수용소에 갇혔던 괴트는 독일 국방군의 제복을 착용하고는 미군에게 자신을 전선에서 귀환한 병사라고 신고했다. 그러나 그의 정체는 곧 드러나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의 소장이던 루돌프 회스와 함께 폴란드로 이송되었다. 1945년 7월에 크라쿠프에 도착한 괴트는 8월부터 9월까지 재판을 받았다. 괴트의 죄목은 수용소에서의 8천 명을 학살에 대한 죄, 게토의 해체 당시에 2천 명의 학살에 관한 책임, 수용소에서 행하여진 수백 명의 처형 책임자라는 죄목이었다. 검찰 측 증인으로서 법정에 불리어진 검사가 유대인의 이름을 읽어나가던 중에 '''그 새끼들은 단 한 명도 남지 않았다고 말할 거면서 왜 말하느냐.''' 라며 소리를 지르며 짜증을 내기도 했으며[* 그러자 검사가 "무슨 소리야? 이 사람들은 다른 수용소 사람인데?" 라고 구라치자 바로 안색을 바꾸고 "그럼 내가 살린 사람들이네요?" 라고 개드립을 쳤다.] 전후 자신의 죄는 힘러가 시켰다는 헛소리나 지껄였다고 한다. 결국 사형선고를 받고 9월 13일에 교수형에 처해졌다. 여담으로 영화 쉰들러 리스트에서도 묘사되어서 굉장히 악한 모습으로 나온다. 그러나 이 놈의 딸인 모니카 괴트는 아버지의 악행을 진심으로 뉘우치고 사죄하는 등 상당히 개념찬 모습을 보여주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38&aid=0000267627|"아버지 죄 용서빕니다."]] 참으로 얄궂게도 이 놈의 손녀인 제니퍼 티지는 흑인 피가 섞였다. 쉰들러 리스트를 보고 나서야 할아버지의 존재를 알았다고 한다. * [[알로이스 브루너]] (1912년 4월 8일 - 2010년 ?월 ?일) * [[오딜로 글로보츠닉]](Odilo Globocnik) (1904년 4월 21일 - 1945년 5월 31일) 최종계급 친위중장(Gruppenführer). 힘러가 붙여준 별명은 '글로부스'(Globus. 지구본이라는 뜻)이다. 폴란드 총독부와 그 주변 유대인 200만명을 학살한 최고 실무책임자.1904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령 트리에스테(현재는 이탈리아령)에서 독일계 슬로베니아인인 프란츠 글로보츠닉과 체코-독일계 세르비아인인 안나 글로보츠닉 사이에서 태어났다. 십대였던 1차대전 당시에는 오스트리아 제국군에서 군사 교육을 받았다. 패전과 합스부르크 제국의 붕괴 이후로는 가족 전체가 오스트리아 남부의 케른텐으로 이사하였으며, 도중에 유고슬라비아와의 전쟁에 참가하기도 했다. 1933년 오스트리아 나치당에 가입하였고, 안슐루스 당시에는 [[아르투어 자이스잉크바르트]]와 함께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 때문에 그는 힘러의 눈에 들어 이듬해 폴란드 총독부령 루블린의 SS경찰 사령관으로 부임하였다. 1941년부터 1943년까지는 라인하르트 작전을 지휘하며 폴란드의 유대인들을 학살하였고, 1943년 이탈리아가 연합군에 항복한 이후로는 라인하르트 작전 당시의 부하들인 프란츠 슈탕글([[트레블링카 절멸수용소]] 소장), 크리스티안 비르트([[베우제츠 절멸수용소]] 소장), 프란츠 라이히라이트너([[소비보르 절멸수용소]] 소장)와 함께 이탈리아로 보내져 자신의 고향이기도 한 트리에스테(아드리아 해 연안 작전 구역)의 SS경찰 사령관으로 부임하여 이탈리아와 유고슬라비아의 파르티잔을 토벌하였다. 1945년에 학살 혐의로 체포되었으며, 직후 청산가리 캡슐을 깨물어 자살하였다. * '''[[오스발트 폴]]''' * '''[[오스카 디를레방어]]''' 36 SS 장갑착탄병 사단 디를레방어의 사단장. [[바르샤바 봉기]]당시 폴란드 주민과 유대인들을 대량학살했다. 게다가 전과마저도 엄청나게 화려해서 '''1934년에 독일여성동맹의 멤버이던 13세 소녀를 성폭행한 혐의'''로 체포되어 2년 금고형의 판결을 받아 직위와 박사 학위를 상실했던 전적이 있었다. 여담으로 [[오토 스코르체니]]와는 사이가 엄청나게 안 좋았으며, 고틀로프 베르거를 제외하면 그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 * [[오토 라슈]](Otto Rasch) (1891년 12월 7일 - 1948년 11월 1일)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의 지시로 졸다우 강제 수용소의 건설에도 종사했고 [[독소전쟁]]이 벌어지던 1941년 6월부터 1941년 10월에 걸쳐서 [[아인자츠그루펜]]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약 8만 명의 유대인 및 소련군 포로를 학살했고 이를 상부에 보고했다. 또한 1941년에는 자신의 지휘 하에 있던 부대를 이끌어서 키예프에서 33,771명의 유대인을 학살하기도 했다. 1947년 9월에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 회부되었지만 심각한 건강상의 이유로 1948년 2월 5일에 재판에서 제외, 그 해였던 11월 1일에 사망했다. * '''[[오토 올렌도르프]]''' * '''[[요제프 마이징거]]''' '''바르샤바의 도살자''' * [[https://en.m.wikipedia.org/wiki/Eduard_Roschmann|에두아르트 로슈만]] (Eduard Roschmann) (1908년 11월 25일 - 1977년 8월 10일) 오스트리아의 그라츠에서 태어난 로슈만은 맥주공장에서 일하다가 오스트리아의 나치당에서 활동했다. 1938년에 [[오스트리아 합병]]으로 오스트리아가 독일과 합병되자 나치 친위대에 입대하여 대위가 되었다. 그는 리가 게토의 부사령관, 그리고 카이저발트의 강제 수용소장을 지냈고 [[홀로코스트]]에도 관여했다. 로슈만은 많은 여성과 아이, 노인들을 차례로 학살했으며. 희생자의 옷, 머리카락, 틀니 등과 같은 것들을 현금자산으로 취급하여 모았다. 그리고 수용자들은 하루에 18시간의 노동을 강요받았고, 대다수가 추위와 배고픔으로 죽어갔다. 그는 처형된 수용자들을 한 곳에 모은 후에 수용자들의 옷을 벗겨서 다른 사람들에게 팔기도 했다. 그리고 '''빈사상태에 빠진 수용자들을 굶주린 개에게 던져주어서 개의 먹이가 되게 만들었다.''' 그 결과 '''약 35,000명 이상'''이 사망했다고 한다. 독일이 패망한 후 그는 독일 국방군의 제복을 입고 연합군의 체포망을 빠져나가는 데 성공했고 그라츠의 가족에게 무사히 돌아갔다. 그러나 1947년 12월 31일에 [[네오 나치]] 조직에서 활동하다가 오스트리아 경찰에 체포되었다. 로슈만은 연합군에게 신병이 인도되기로 결정되어 영국군에게 압송될 예정이었지만 감시가 소홀해진 틈을 타서 달아났다. 그 후 여러 협력자의 도움을 얻어 오스트리아로 잠입한 그는 로마를 지나서 아르헨티나로 도망갔다. 아르헨티나에 도착한 그는 이름을 프레데리크 베게너로 바꾼 후 가구공장을 경영했다. 1955년에는 비서와 재혼했지만 이 소식이 그의 전 아내에게 알려지면서 중혼죄 혐의로 쫓기게 되었고. 1960년에는 그가 적어도 '''3천명의 유대인을 학살했고 어린이 8백명을 학살했다고 판단되어''' 그의 학살행위에 대한 체포영장이 나왔다. 그러나 워낙에 잘 도망다닌 탓에 잡히지 않았고 파라과이까지 도망가 편하게 살다 1977년 8월 10일에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 [[에두아르트 슈트라우흐]] (Eduard Strauch) (1906년 8월 17일 - 1955년 9월 15일) [[독소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아인자츠그루펜]]의 지휘관이 되어 제 2대 대장으로 임명되었다. 그의 부대는 1941년 11월 30일부터 '''10,600명의 유대인을 룸블라 숲에서 살해하는''' 등 벨라루스의 홀로코스트에 관여했다. 1941년 12월에 [[벨로루시]]의 보안경찰 및 첩보지휘관으로 취임한 그는 러시아에서 '''55,000명의 유대인을 10주간에 걸쳐 무자비하게 살해했다.''' 그가 하도 잔인해서 다른 러시아 점령지의 지휘관 에리히 폰 뎀 바흐-첼레프스키 대장은 그를 현재껏 만난 인물들 중 가장 최악의 인간이라고 평가했다.[* 골 때리는 사실은 첼레프스키도 러시아 지역에서 민간인 학살에 관여했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바르샤바 봉기]] 당시 20만의 민간인을 학살한 사실이 있으니 할 말 없다.] 독일의 패전 후 미군에게 붙잡힌 슈트라우흐는 학살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지만 슈트라우흐는 자신이 정신병자라면서 자신의 죄를 부인했지만 법정은 그의 말을 쌩까고 사형판결을 내렸다. 하지만 벨기에 정부가 슈트라우흐를 자국의 전범으로 세우고 싶다고 원하여 미국은 그의 신병을 벨기에로 인도했고, 벨기에 법정에서도 쌍으로 사형판결을 받았으나. 그러나 사형이 집행되기 전인 1955년에 감옥에서 병을 얻어 사망했다. * '''[[에르빈 뢰제너]]''' * [[에른스트 하인리히 슈마우저]] * '''[[위르겐 슈트로프]](Jürgen Stroop)''' (1895년 9월 26일 - 1952년 3월 6일) 슈트로프는 아내가 광신적인 반유대주의자였고, 자신도 [[에리히 루덴도르프]] 장군을 흠모했기 때문에 나치즘에 공감했다. 1932년 7월에 [[나치당]]에 입당한 그는 친위대에도 가입했다. 1932년 11월의 국회의원 선거에서 나치당원의 승리에 공헌하여 [[하인리히 힘러]]의 눈에 띈 슈트로프는 제72 친위대 연대의 지도자가 되었고, 1941년 12월부터 1942년 10월까지 러시아 남부의 친위대 및 경찰고급지도자였던 한스 프리츠만 대장 아래에서 보안경찰 및 감찰관으로 일하며 남러시아의 치안유지에 종사했다. 그러던 중에 다른 친위대 대원이 [[바르샤바 게토 봉기]] 진압에 실패하면서 해임되자 힘러는 슈트로프를 그 자리에 앉힌 뒤, 그에게 진압을 맡겼다. 그는 곧바로 초토화시키는 작전을 실시하여 바르샤바를 [[생지옥]]으로 만들고 봉기한 유대인들을 닥치는 대로 죽였다. 그리고 봉기의 핵심조직이던 “유대인 전투조직”의 사령부 지하호를 발견하여 지휘관을 살해하는데 성공하자 그는 5월 16일에 정식으로 [[바르샤바 게토 봉기]] 진압작전의 종료를 선언하고는 그 기념으로 유대인 교회당을 박살내버렸다. 슈트로프의 보고서에 의하면 이때에 '''56,000명의 유대인을 체포하였고, 약 7천 명을 사살하였으며, 체포한 유대인들을 이송하던 중에 또 다시 약 7,000명을 처형하여 총 이전에 죽인 숫자를 합쳐서 무려 14,000명을 죽였다고 한다. 거기다가 간접적인 화재 피해와 유탄에 맞아 사망한 폴란드인들만 해도 6천명이 넘었다. 그리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모두 포로가 되어서 강제 수용소로 보내졌다.''' 패전 후 1945년 5월에 체포되어 미군 병사 살해혐의로 미군 군사법정에 세워져 1947년 3월 22일에 사형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다시 폴란드 정부로 인계된 슈트로프는 폴란드의 법정에 세워져 [[바르샤바 게토 봉기]]진압의 책임자로 다시 사형 판결을 받고, 1951년 9월 8일에 바르샤바에서 처형되었다. * [[에리히 프리프케]] (Erich Priebke) (1913년 7월 27일 - 2013년 10월 11일) 이탈리아에서 비무장 민간 수천 명을 학살하였다. [[http://static.guim.co.uk/sys-images/Guardian/Pix/pictures/2013/10/11/1381505959739/Erich-Priebke-008.jpg|훗날 붙잡혔을 때의 모습]] * [[에리히 폰 뎀 바흐-첼레프스키|에리히 폰 뎀 바흐첼레프스키]](Erich von dem Bach-Zelewski) (1897년 3월 1일 - 1972년 3월 8일) [[무장친위대]] 대장. [[바르샤바 봉기]] 진압 총 책임자. '''폴란드계''' 출생이었음에도 민족을 배반하고 바르샤바 봉기를 잔혹하게 진압했다. 민간인 5만 명을 학살한 볼라 학살(Wola Massacre)의 주도자이다. 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 * '''[[카를 프리치]](Karl Fritzsch)''' [[http://ikolbe.com/WebzineContentsView.uo?webzinecontentsidx=378&boardidx=21]] * [[클라우스 바르비]] (Klaus Barbie) (1913년 10월 25일 - 1991년 9월 25일) [[https://www.awesomestories.com/images/user/e1c0a9e9ac.jpg?width=300|다른 사진]] 독일 노르트라인 베스트팔렌 주에서 태어났고 히틀러 유겐트의 일원이었다가 1935년 친위대 소속의 보안대에 입대했다. 2차 대전 중인 1942년 리옹의 게슈타포(나치 비밀경찰) 제 4분과 책임자로 있으면서 프랑스 레지스탕스 지도자인 장 물렝을 잔혹하게 고문해 살해하고, 자신과 동거하던 스위스 여인을 싫증난다는 이유만으로 총살시켰으며, 어머니 품속에 있던 유대인 아기를 빼앗아 유대인 수송 화물열차 모서리에 던져 죽이고, 유대인을 포함한, 리옹시 주민 650명을 강제 수용소로 보냈으며, 산간 학교에 숨어있던 유대인 어린이 44명을 체포해 5명의 교사들과 함께 아우슈비츠로 강제이송 시켰으며, 아이들을 모두 가스실에서 죽었다. 4000명을 살해하고 7500명을 추방시키면서 일명 '리옹의 도살자'라는 별명이 붙여졌다. 종전 후 그는 미군에 의해 체포되었으나, 미 정보기관에서 그의 능력을 높이 사 볼리비아로 피신시켜주었다. 볼리비아에서 그는 미 방첩대(CIC) 요원이 되었으며, 클라우스 알트만이라는 가명으로 살면서 사업가로 성공했다. 1970년, 볼리비아 정부에 의해 체포되었으며, 1971년 나치 추적자인 클라르스펠트 부부에 의해 그의 정체가 드러났다. 1993년 볼리비아에 민주화가 이루어지면서 바르비는 프랑스로 강제 송환되었으며, 공소시효가 없는 '반인륜범죄'로 재판에 기소, 종신형을 선고 받고 리옹 감옥에서 복역 중에, 1991년 감옥에서 사망했다. [[http://static.prsa.pl/images/98a8c9b5-8aa4-4111-b268-4f797270d295.jpg?width=300|법정에서의 모습]] * [[쿠르트 발트하임]] 전후 유엔 사무총장이며 오스트리아의 대통령을 지냈으나 후에 돌격대 장교 근무가 들통난 인물이다. 전 버전과 달리 친위대와는 관련이 없다. 나치에서의 행각은 굉장히 잔인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런 인물이 유엔 사무총장을 거쳐 오스트리아 대통령까지 된 걸 보면 역사의 아이러니. * '''[[파울 블로벨]]''' (1894년 8월 13일 - 1951년 6월 8일) 독일의 포츠담에서 태어난 그는 [[제1차 세계 대전]] 때 1, 2급 철십자 훈장을 받았고 1차대전 후 건축업에 종사했지만 경제공황의 여파로 실직했다. 그러다가 1931년에 [[나치당]]에 입당하였고 나치 친위대의 대원이 되었다. 그리고 [[독소전쟁]]이 발발하고 난 뒤인 1941년 6월에 우크라이나에서 [[게릴라]]의 토벌에 나선 그는 자신의 [[아인자츠그루펜]] 부대를 이끌면서 '''본격적인 만행을 시작했다.''' 그는 [[발터 폰 라이헤나우]] 등과 긴밀히 협조하여 키예프 등지에서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살해하여 약 15,000명이나 되는 사람을 총살시켰다. 이 때 그가 저질렀던 학살 중 가장 유명한 학살이 우크라이나 바비야르에서 '''꼴랑 36시간만에 3만 7천여 명을 학살한, 참으로 쓰잘데기없을 뿐더러 인류 역사상 전대미문의 대학살인 [[바비야르 학살]]이다.''' 그러나 평소 알코올 중독으로 고생했던 블로벨은 몸이 상하여 1942년 1월 13일에 지휘관 자리에서 물러났지만 1942년 6월부터 [[아인자츠그루펜]] 부대의 학살과 같은 동유럽에서 벌어진 학살에 대한 증거를 인멸하는 부대의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는데, 그가 맡을 임무는 학살된 시체들을 묘지에서 발굴해 소각하는 일이었다. 전후에 연합군에게 체포되어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 세워진 그는 사형을 언도받고, 1951년 6월 8일에 란츠베르크 형무소에서 유언으로 '''"나는 우리 국민들의 신앙 속에서 죽는다. 내가 오로지 바라는 것은 독일 국민이 적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 뿐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교수형으로 처형되었다. 여담으로 알코올 중독자이면서 성격이 더러웠다고 전해진다. * [[프란츠 발터 슈타흘레커]] * [[프란츠 직스]] * [[프리드리히 예켈른]] (1895년 2월 2일 - 1946년 2월 3일) 함부르크에서 태어난 예켈른은 나치당 초반부터 친위대에 머무르면서 친위대 경찰고급지도자까지 올라갔다. 그 후 [[제2차 세계 대전]] [[서부전선]]의 해골사단 제2 보병연대 사령관으로 있다가 1941년 6월에는 [[동부전선]]에 파견되었다. 남러시아의 친위대 및 경찰고급지도자로 임명된 예켈른은 9월 29일부터 30일에 벌어진 키예프의 대학살에 관여했다. 1941년 11월부터 독일의 패전까지 예켈른은 자신의 지배지구인 [[동부전선]]에서 [[아인자츠그루펜]]의 유대인 및 빨치산 살해활동을 감독하기도 했다. 예켈른은 자신이 지은 "예켈른 방식"이라는 조직적인 대량학살을 실행했는데 기가 막힌 사실은 그는 학살을 즐겼다고 한다. 1941년 11월 30일부터 12월 8일에 걸쳐 룸블라 숲에서 일어난 유대인 학살 당시 약 500명-1,000명 정도의 주민들을 나란히 배열시킨 후 10km 떨어진 남쪽의 처형장으로 이동하게 한 다음 희생자들의 옷과 금품을 뺏고, 나체가 된 포로를 총살시켜서 구덩이로 밀어넣었다. '''룸블라의 학살 당시에는 무려 25,000명의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1945년 1월부터 2월까지 제5 SS 산악군단장으로 일한 예켈른은 독일이 패하면서 소련군에 의해 포로가 되었다. [[라트비아]]의 리가에서 소련의 군사법정은 1946년 2월 3일 그에게 사형을 선고한 후 선고 당일 바로 그를 교수형에 처했다. * [[프리츠 크뇌힐라인]](Fritz Knöchlein) (1911년 5월 27일 - 1949년 1월 28일) [[SS]] 토텐코프 소속 장교. 1940년 [[프랑스 침공]] 중 르 파라디에서 영국 노보크 연대 병사 89명에 대한 학살을 주도했으며 도망치는 여자들까지 조준사격했다. 이 때 학살의 증인인 [[헤르베르트 브루네거]]를 죽이려고까지 했다.[* 브루네거가 이 때 "저들은 여자잖습니까?" 라고 항명하자 이 이후로 그를 죽이기 위해 그에게 온갖 부당한 명령을 해댔다.] 종전 후 영국에 인도되어 르 파라디 학살의 책임을 지고 1949년 처형당했다. * '''[[하인츠 라인파르트]]''' (1903년 12월 26일 - 1979년 5월 7일) [[바르샤바 봉기]] 당시 볼라 학살의 책임자 중 하나이다. * [[하인츠 레머딩]] (Heinz Lammerding) (1905년 8월 27일 - 1971년 1월 13일) [[오라두르쉬르글란 학살]]의 책임자. * [[한스 라우터]] (1895년 2월 4일 - 1949년 3월 25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클란겐푸르트에서 태어난 라우터는 1914년에 오스트리아 육군에 입대해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산악부대 중대장의 부관으로 종군하다가 1915년에 부상을 입어 전장에서 제외되어 1918년 7월에 예비역 중위로 퇴역했다. 전후인 1919년부터 1921년까지 의용군에서 활동한 후 오스트리아인 사회주의 단체에 가입하여 그 리더가 되었다. 1933년에 히틀러에 의해서 사회주의 단체가 해산하면서 아이러니하게도 한스 라우터는 나치당에 입당했고 1935년까지 돌격대에 재직하면서 돌격대 대령까지 승진했다. 1935년 2월 20일에 친위대로 이적한 그는 친위대 상급대령의 계급이 주어져 힘러의 측근이 되어 특무장교로 일했다. 1936년 4월에 친위대 본부에서 잠시 근무하다가 힘러의 부관으로서 1938년까지 일한 라우터는 이후 친위대 남동지구 사령관으로 일했다. 제 2차 세계 대전으로 독일군이 네덜란드를 점령하자 1940년 6월 26일에 친위대 소장계급으로서 네덜란드 주둔 친위대 사령관 및 경찰지도자로 임명된 라우터는 이후 독일의 패전까지 그 직위를 유지했다. 국가변무관으로서 네덜란드의 통치를 담당했던 [[아르투어 자이스잉크바르트]]와 함께 네덜란드에서 이루어진 유대인 탄압 정책을 담당했다. 한스 라우터는 유대인을 죽음의 수용소로 보내기 전 임시로 수용하는 임시수용소를 짓고 이송열차로 네덜란드에 거주하는 유대인을 확보하여 아우슈비츠 등지로 보냈는데, 안네 프랑크도 그 희생자의 한 명이었다. 라우터는 약 3만 이상의 유대인을 수용소로 보냈다. 1945년 3월 6일 밤에 승용차로 이동하던 라우터는 독일군으로 위장한 레지스탕스의 습격을 받았지만 목숨을 건졌다. 하지만 전후 영국군의 포로가 된 라우터는 네덜란드 정부에 신병이 인계되어 재판에 회부되어 1949년 1월 12일에 전쟁범죄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아 3월 25일에 총살형에 처해졌다. * [[호르스트 뵈메]] (1909년 8월 24일 - 1945년 4월 10일) 1930년에 나치당에 입당해 친위대 대원이 되었고 1935년부터 친위대 정보부에 배치되어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의 휘하에서 일하며 하이드리히의 명령으로 [[암살]]과 관련된 작업을 했다. 1938년 3월 14일에 빈의 독일대사관에 근무했던 빌헬름 폰 케텔러 남작을 암살한 공로를 인정받아 승진했고. 1939년 봄에 체코의 프라하에서 보안경찰서장으로 취임한 그는 [[게슈타포]]를 이끌면서 고등교육을 폐지하고 프라하의 마음에 들지 않는 학생 약 천 오백여명을 작센하우젠의 강제 수용소로 보냈고, 유대인 이송회합에 참가하기도 했다. 그는 프라하의 보안경찰 및 정보부 지휘관으로 임명되었고,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가 암살 당하자 보복에 나서서 그 악명 높은 리디체 마을에서 학살을 했다. 그 후 루마니아의 부크레슈티에서 보안경찰로 일하다가 1943년 1월부터 8월까지 [[아인자츠그루펜]]의 사령관이 되어 벨라루스에서 학살을 자행했고 1943년 9월부터 1944년 3월에는 우크라이나에서도 민간인 학살을 했다. 그러다가 1945년 4월 10일 그는 전투 도중에 행방불명되었고, 1954년에 독일 법정은 그가 1945년 4월 10일에 사망한 것 같다고 선고했다. * [[에리히 바우어]] (Hermann Erich Bauer) (1900년 3월 26일 - 1980년 2월 4일) 베를린에서 태어난 바우어는 나치당이 정권을 장악한 후에 1933년 입당해 돌격대 대원이 되었다가 다시 친위대로 이적했다. 그는 1940년까지 차장 일을 하다가 1940년 후반에 [[T-4 프로그램]]에 참가하면서 승진했다. 1942년 4월에 소비블 강제 수용소로 파견된 바워는 그곳에서 유대인과 집시들의 가스실 처형을 담당했다. 얼마나 유대인들을 잔인하게 처형했는지 수용자들은 바워에게 '''목욕탕의 마이스터(장인)'''라는 별명을 붙일 정도였다. 전후에도 그 악명으로 인해 가스실의 마이스터라고 불리던 바우어는 소비블 강제 수용소의 탈주극이 벌어졌을 때 수용자들에게 살해된 친위대 중사 루돌프 베크만의 시체를 처음으로 발견하여 가까이에서 일하던 유대인 수용자 2명을 총살하기도 했다. 전후 오스트리아에서 미군의 포로가 된 바워는 1946년에 석방되어 [[베를린]]에 머물렀지만 1949년에 소비블에서 일어난 탈주극에서 살아남은 수용자들이 그를 고소하여 다시 체포되었다. 전범혐의로 기소된 바우어는 1950년 5월 8일에 사형 판결을 받았지만, 서독에서 사형이 폐지되면서 종신형으로 감형된 후 1971년에 가석방되었고, 1980년에 사망했다. * [[헤르베르트 바흘러]]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